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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룡의 신 영웅전] 왕양명의 정치 비판

왕희지(王羲之)의 후손인 왕수인(王守仁·1472~1528)은 저장(浙江)성 콰이지(會稽) 출신으로 호가 양명(陽明)이다. 17세에 장가가는 날 어느 고명한 선생을 만나 학문을 배우다가 장가가는 것도 잊고 다음 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과에 급제해 촉망받았으나 환관의 잘못을 비판하다가 변방의 역참(驛站) 관리로 좌천됐다. 3년 만에 병부에 복귀해 두 번의 반란을 평정했다.   전선의 별빛은 인간을 고뇌하게 만들고, 그 고뇌에서 철학이 나온다. 그래서 무인 중에 철학자가 많고, 조선 왕조의 이름 있는 현판 중에는 무인의 글씨가 많다. 그는 남들처럼 주자학을 공부했으나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특히 왕실에서 『주자대전(朱子大全)』으로 과거를 치르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주자는 『대학』을 편집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라’(親民)는 구절은 비슷한 글자를 잘못 읽은 것이라며 ‘백성을 가르치라’(新民)로 바꿔 해석했는데, 이를 두고 왕양명은 ‘그 바람에 주자가 선비들의 입을 막았다’고 비판했다. 왕양명은 “허다한 진리를 어찌 그대만 알고, 그대만 옳은가”라며 주자에 항명하니 후세가 이를 양명학이라 불렀다.   그의 제자들이 『전습록(傳習錄)』을 지어 후대에 남겼다. 제자들이 “왜 세상이 이토록 어지럽습니까”라고 여쭈니 왕양명은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학문을 바로 세우지 못했기 때문(天下不治 學術不明)”이라며 정치인들을 나무랐다. 그러면서 왕양명은 아는 것과 행실이 같지 않은 무리를 경계했다.   지금 한국 정치는 해방 정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정치인이 공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회도서관 대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어를 전공한 어느 국회의원이 “대통령이 비서진을 호가호위(狐假虎威)한다”며 사자성어를 잘못 사용했다. 듣고 있는 국민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이 나라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왕양명 정치 정치 비판 한국 정치 호가 양명

2024-07-28

[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부식의 주택론

경제학의 ‘슈바베의 법칙’에 따르면 생계비에서 주거비용 지출이 많을수록 삶이 곤궁하며, 이런 현상은 빈곤층일수록 더 심하다. 그렇다면 부자들은 슈바베 지수가 낮다는 뜻인데 한국은 그렇지 않다. 누구는 집값이 150억원이고, 누구는 봄철 내부 수리비가 72억원이 들었다는 기사에 서민의 억장이 무너진다. 언제인가 나는 부잣집에 갔다가 화장실에 다녀온 후 방을 못 찾은 기억이 오래 남아 있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주거비가 높은 것은 한국의 특징이다. 집값이 높고, 특히 담장과 대문 건축비는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대문을 아홉 번 지나가야 주인마님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이는 주거가 삶의 편의가 아니라 신분의 허세이기 때문이다. 이미 고려 건국공신 최승로(崔承老)는 우리 민족은 집에 너무 많은 돈을 쓴다는 걱정을 982년에 남겼다.   호화 주택 문제를 가장 뼈아프게 지적한 인물은 고려 중기 문신 김부식(金富軾·1075~1151)이다. 그에 관한 평가는 말이 많지만, 그가 저술한 『삼국사기』 덕분에 그 시대사를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었다. 통일신라의 마지막 왕이던 경순왕의 후손인 그는 백제를 그리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백제 온조의 저택(궁궐)을 논하면서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아름답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儉而不陋 華而不侈)’고 기록했다.   현대 경제학에서 말하는 주거의 정도는 식구 한 명에 5평, 4인 가구라면 30평 정도면 불편하지 않다. 일본 재벌 마쓰시타(松下)의 창업주는 평생 2층 다다미의 작은 단독 주택에 살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권고는 별로 의미가 없다. 주택난 때문에 신혼부부가 25년을 벌어야 빚 없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혼기와 출산을 늦추고 출산율 절벽 현상이 초래됐다. 주택 정책의 실패가 한국 경제에서 만악의 근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권은 무능하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김부식 주택론 주거비용 지출 현대 경제학 한국 경제

2024-03-17

[신복룡의 신 영웅전] 공자의 자식 교육

진항(陳亢)은 공자(孔子)의 제자였다. 그는 공자가 자식을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혹시 아버님에게서 남다른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이에 백어는 “그런 일은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공자가 혼자 뜰에 있을 적에 백어가 허리를 굽히고 빨리 지나가니 “너는 시(詩)를 읽었느냐”고 물었다. 이에 백어가 “배우지 못했다”고 아뢰자 공자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다른 날 또 공자가 뜰에 있을 적에 백어가 허리를 굽히고 그 앞을 지나가려니 “너는 예(禮)를 배웠느냐”고 물었다. 백어가 “아직 배우지 못했다”고 아뢰었더니 공자는 “사람이 예를 배우지 못하면 바로 서지 못한다”고 말했다. 백어가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은 이 두 가지가 전부였다. 진항은 기뻐하며 말했다.   “세 가지를 알았다. 시에 관해 들었고, 예에 관해 들었고, 군자는 자기의 자식을 멀리한다는 것을 알았다.” 공자가 뜰을 거닐며 자식을 가르쳤다 해서 이 고사는 ‘정훈(庭訓)’이라 한다. (『논어』 계씨편)   군자는 자기 자식에게 성화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빗나가는 이유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성화가 지나치기 때문이다. 내가 어려서 고향을 떠나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니 어머니는 눈물을 글썽이시는데 아버지는 반가운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잠결에 아버지가 내 몸을 쓰다듬으며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컸어.” 아버지는 그렇게 자식이 잘 때 사랑하셨다. 그것이 내가 느낀 부정(父情)의 전부다.   지금 한국사회는 학교 교육이 무너졌다. 가정도 무너졌고, 아버지가 실종됐다. 어른들 말씀에 따르면 자식은 잠들었을 때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그런 말이 없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씀을 한 번도 못 들은 것이 가슴에 맺힌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공자 자식 자식 교육 백어가 아버지 백어가 허리

2023-11-26

[신복룡의 신 영웅전] 도척만도 못한 세상

공자(孔子)의 친구 유하계(柳下季)에게 도척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부하 9000명을 거느리고 천하를 횡행하는 도적이었다. 공자는 도척을 회개시키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가 훈계했다.   그랬더니 도척이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길어야 백 년이고 짧으면 60년인데, 그나마 아프고 근심하는 시간을 빼면 일생이 얼마나 된다고 주제넘게 남을 훈계하러 다니시오. 어서 돌아가 자신이나 돌보시오.” 그 말을 듣고 공자가 그 집을 나오는데 너무 무안해 말 고삐를 잡으려다 세 번 헛손질했다.   어느 날 도척이 도적질에 대해 강의하는데, 한 제자가 “도적질에도 도(道)가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도척이 이렇게 대답했다. “저 안에 값진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를 안다면 성인(聖)의 경지요, 이번 도둑질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를 안다면 지혜로운(知) 일이요, 먼저 담을 넘어들어가는 것은 용기(勇) 있는 일이요, 맨 나중에 나오는 것은 의리(義) 있는 일이요, 장물을 고루 나누는 것은 어진(仁) 일이다. 그러니 어찌 도적에게 도가 없겠느냐. 그러나 나는 아직 이 다섯 가지 도를 모두 갖춘 도적을 보지 못했다.”(『장자』 재유·도척 편)   세상이 많이 더러워졌다. “모든 재산은 어차피 훔친 것”이라는 프랑스 아나키스트 철학자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1809~1865)의 말이 다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이들 훔치고 있다. 사법부 수장이 입방아에 오르고, 특검이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받고, 대통령 출마 정치인이 검은돈과 연루돼 사법 절차를 밟고 있으니 우리 사회는 그리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다.   전 세계에서 사기 범죄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고 일본의 38배라는 보도를 봤다. 우리야 어차피 도척만도 못한 세상을 살았지만, 후대에 물려줄 유산이 부끄러워 마음이 허허롭다. 정말로 내년 4월 총선에서 잘 뽑아야 할 텐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사법부 수장 프랑스 아나키스트 피에르 조제프

2023-07-30

[신복룡의 신 영웅전] 유마힐 거사의 작은 방

경기도 광릉 봉선사(奉先寺)의 큰 스님인 월운(月雲) 조실(祖室)께서 최근 입적하셨다. 『팔만대장경』 번역을 끝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던 그분 앞에 꿇어앉아 천주교 신자인 내가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를 배우던 40년 전의 인연이 생각났다. 이렇게 한 시대가 가는구나 싶어 마음이 처연하다.   큰 절 중에서도 참선하고(禪院), 불법을 가르치고(講院), 계율을 가르치는(律院) 시설을 갖추면 총림(叢林)이라 부른다. 국내엔 해인사·송광사·통도사·수덕사·백양사·동화사·쌍계사·범어사 이렇게 여덟 곳이 있다. 그곳의 가장 높은 어른을 방장(方丈)이라 부른다.   불교사에서 방장 칭호를 처음 들은 분은 부처님의 제자인 유마힐(維摩詰) 거사인데, 그는 평신도였지 스님이 아니었다. 불가에서는 『화엄경(華嚴經)』처럼 부처님의 말씀만을 ‘경’(經)이라 부르고, 제자들이 지은 것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처럼 ‘론’(論)이라 부른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이 아닌 글 중에 경이라 높여 부르는 것은 딱 두 권인데, 유마힐의 『유마경(維摩經)』과 육조(六祖) 혜능(惠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이다.   유마힐 거사는 불제자보다 뛰어나 당대부터 지금까지 교파를 초월해 존경받는다. 그의 말씀에 따르면 평생해야 할 일은 베풀고(布施), 참으며, 정진하고, 수행하고, 지혜를 배우는 여섯 가지, 즉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색·파계·분노·나태·번뇌·무지의 여섯 가지, 즉 육폐(六蔽)다.   유마힐 거사가 세상을 떠날 때 살던 방이 사방(四方) 여섯 자(尺, 6척=1.8m)였다. 한 모서리의 길이가 사람 키와 같은 한 길(丈)이어서 그때부터 고승의 청빈함을 뜻하는 용어로 방장(方丈)이라 했다. 종교를 가릴 것 없이 요즘 대형 교당과 호화로운 성직자의 삶을 보노라면 유마힐 거사의 믿음을 입에 담기도 부끄럽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유마힐 거사 유마힐 거사가 부처님 말씀 경기도 광릉

2023-07-09

[신복룡의 신 영웅전] 원효대사의 가르침

충북 괴산 군자산(君子山)은 원효(元曉) 대사가 수행하던 곳이어서 원효굴(元曉窟)과 원효사(元曉寺)가 있고 일화도 여럿 구전되고 있다. 어느 날 원효 대사가 상좌 중과 길을 걷다가 개울을 만났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물이 불어나 있었다. 그런데 원효는 서슴없이 옷을 벗더니 아랫도리를 다 드러내고 물을 건너려 했다.   마침 옆에는 젊은 여인이 난감하게 서 있었다. 원효는 주저 없이 그 아낙을 둘러업고 물을 건넜다. 개울 저편에 도착한 원효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을 입고 길을 걸었다. 뒤따라오던 상좌 중이 원효에게 말했다.   “이제 저는 스님의 곁을 떠나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출가한 스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젊은 여인을 업고 내를 건넜으니 계율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원효가 상좌 중에게 말했다. “너는 아직도 그 여인을 업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여기에서 원효가 버리기를 바라는 것은 번뇌다. 깨달음에 이르려면 해야 할 첫 과업이 ‘번뇌를 끊는 것(斷德正因)’이다. 원효는 “악업이 허망한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망상일 수도 있고 분심(分心)일 수도 있고 걱정거리일 수도 있다.   절에 가면 ‘칼을 찾는 곳’을 뜻하는 심검당(尋劍堂)이란 별채 건물이 있다. 스님이 칼을 찾아서 어디에 쓰려고 하시나. 마곡사(麻谷寺) 한 비구니가 대답했다. “마음의 번뇌를 끊으려고요.”   인간이 번뇌로부터 얼마나 괴로움을 겪느냐 하는 문제는 부처부터 원효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제기됐다. 인간의 번민이나 걱정거리 가운데 85%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Stephanie Dolgoff, 2007). 그러니 인간의 번뇌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던가.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더욱 새롭다. 신복룡 / 전 건국대 석좌교수신복룡의 신 영웅전 원효대사 가르침 원효 대사 걱정거리 가운데 충북 괴산

202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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